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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과 엄천강, 차밭에 깃든 점필재의 발자취

기사승인 [157호] 2025.03.10  16: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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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8. 김종직의 관영차밭 조성

점필재 김종직은 1471년(성종 2년)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 다원(茶園) 조성이다. 당시 함양군민은 해마다 진상품으로 나라에 차를 바치고 있었다. 차가 나지 않은 함양에서 차 공급을 하려고 전라도까지 가서 쌀 한 말과 차 한 홉을 바꾸어 바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1474년 점필재는 동호마을 엄천사에 관영 차밭을 조성하여 민초들의 고충을 해결했다.

엄천강은 주변의 푸른 산과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한껏 자랑한다. <사진: 함양군>

지리산에서 막 내려온
엄천강의 몸에선
밤이 깊도록
점필재 관영 차밭 녹차 향내가 났다

엄천강은 가얏고 음율로 흐르고
지리산은 깊은 밤에도 눈을 뜨고 있는
성자(聖者) 같았다

우리는 곧 광막한 바다에 닿을 것이다
몸부림치는 엄천강도
성자를 닮은 지리산도
당신도 나도

시인 김성춘의 시 ‘지리산’이다.

휴천 동호마을은 절터라고 부른다. 동호마을은 엄천사지로 알려지고 있다. 절 북쪽에 대규모 차밭이 있었다. 신라 희강왕 원년인 836년에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茶)나무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었다. 사찰 뒤편 차밭엔 차나무들이 즐비하였다. 관리하지 않은 야생 차나무들은 땔감용으로 베어지고 훼손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엄천사는 당나라에서 차가 들어와 지리산에 심어진 59년 후인 883년에 신라 결언선사가 창건하였다. 헌강왕은 재위 9년에 결언선사에게 ‘법흥왕은 도리사, 진흥왕은 황룡사, 애장왕은 해인사, 무열왕은 감은사’ 같은 큰 절을 지어 국운 신장을 기원한 것처럼 지리산에 사찰 불사를 부탁하였다.

통일신라 이후 민간에는 미륵신앙이 널리 퍼졌다. 미륵이란 수십 억 년 뒤 세상의 구원을 가져온다는 부처의 화신이다. 당시 귀족들의 아귀다툼에 휘말린 백성들의 고단한 삶을 종교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승려는 머리를 깎고 출가하여 속세와는 인연을 끊은 이들이니 세상에서 벗어난 아웃사이더였다. 그래서 승려들은 밥풀로 불가사리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신통력을 가진 존재로 묘사되기도 하고 몰래 여염집에 숨어 들어가 여인들과 놀아나는 악당으로 그려지기도 했다.

명을 받은 결언선사는 지리산에 와서 산의 맥을 짚고 시내를 거슬러 올라가다 휴천면 절터 강변에 터를 얻었다. 절이 완성되자 왕은 ‘엄히 계율을 지켜 한량없는 복을 받는 것이 냇물이 쉬지 않고 흐르는 것과 같다’는 뜻을 지닌 ‘엄천사(嚴川寺)’ 라는 명칭을 하사하였다.

절 앞을 흐르는 강은 엄천사가 있어 엄천강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낙성법회 후 결언선사를 국사라 칭하고 주지로 삼았다. 당나라에서 돌아온 최치원(885년 귀국)에게 명하여 발원문을 짓게 했다.

엄천사는 신라, 고려를 거치면서 번창하여 점필재 김종직이 함양군수로 재임할 당시만 하더라도 찬란한 절로 남아 있었다. 왕명에 의해 건립된 전국 최대의 절이라 할 만큼 엄청난 규모와 세력을 자랑했다. 임진왜란 때 불탔고 엄천사기(嚴川寺記))는 인근 법화사에 보관되었다. 흥폐사적문의 기록에 의하면 18동 100칸의 규모였다고 한다. 이곳은 천년이 지난 지금도 사찰 기둥 기초석 조각,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다.

점필재 김종직은 지금부터 600여 년 전 함양군수였으며 조위, 유호인, 임대동, 한인효 등과 두류산을 등반하고 기행문 ‘유두류록’을 남겼는데 지리산 등반 당시 엄천사는 건재하였다.

엄천사에서 유호인, 임대동과 함께 세 사람이
차 달여 마시며 청담으로 회포를 풀었네
하룻밤 동안 벼슬살이 모두 잊었는데
여울 소리에 꿈을 깨어 문득 시를 찾누나

점필재 김종직은 1471년(성종 2년)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대표적인 것이 지리산 다원(茶園) 조성이다. 당시 함양군민은 해마다 진상품으로 나라에 차를 바치고 있었다. 차가 나지 않은 함양에서 차 공급을 하려고 전라도까지 가서 쌀 한 말과 차 한 홉을 바꾸어 바치는 고통을 감내해야 했다.

김종직은 ‘삼국사’를 읽다가 “신라 때, 차 종자를 당나라에서 얻어다가 나라에서 지리산에 심도록 명했다”는 기록을 발견한다. 함양이 바로 지리산 아래인데 어찌 신라 때 심은 종자가 남아있지 않겠는가? 그는 그때부터 노인들을 만날 때마다 이를 묻다가 엄천사 북쪽 대숲에서 차나무 두어 그루를 찾아낸다.

지리산 등정을 한 1471년에서 3년 후인 1474년에 점필재는 기뻐하며 동호마을 엄천사에 관영차밭을 조성하여 민초들의 고충을 해결하니, 백성들이 편해졌다 하여 다원시를 남겼다. 점필재의 목민관으로서 백성을 위한 애민정신을 느낄 수 있는 시이다.

영험한 차를 올려
우리 임금 오래오래 사시도록 하고 싶은데
신라 때 심었다는 종자 아무리 찾아도 찾지 못하였네
이제야 두류산 아래서 차나무를 구하게 되었으니
우리 백성 조금은 편하게 되어 기쁘구나.

우리는 점필재의 관영차밭이 있던 부근에 차밭을 조성하여 지방관이 백성을 다스리는 자세를 되새겨볼 수 있는 스토리를 전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하겠다. 가까운 곳에 녹차를 마실 수 있는 찻집이라도 생기면 지리산을 찾아 오가는 길손들이 그냥 스쳐 지나가지는 않으리라 생각된다.

함양군 휴천면은 2024년 7월 13일 동호마을 주민과 선산 김씨 종중, 휴천면 기관·사회단체장 등 30여 명이 모인 가운데 ‘동호차밭’ 완공에 대한 고유제를 개최했다.<사진: 함양군>

절터에는 점필재 김종직 관영차밭 조성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1790년 이동항은 ‘방장유록’에서 엄천 골짜기를 자세히 묘사해 놓았다. “아! 엄천과 마천은 예로부터 살기 좋은 낙토로 알려진 곳이다. 60리에 걸쳐있는 큰 골짜기의 논과 보리밭은 한 조각의 땅도 놀리는 일이 없고, 뽕나무·삼나무·닦나무·옻나무·나무 그릇·감나무·밤나무 등의 이익은 도내에서 최고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빽빽이 모여 사는 마을이 이어져 있으며 주민 모두 즐겁게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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