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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란밥

기사승인 [134호] 2024.03.08  21:5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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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숙 소설가.

어릴 적 우리 집에서 닭을 키워 알을 얻었다. 하루에 몇 안 되는 알을 모아서 장에 내다 팔았고, 간혹 할머니 밥상에 계란후라이로 오르기도 했다. 할머니는 그걸 장남인 오빠 밥그릇에 올려주셨고 오빠를 제외한 우리 남매는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했다.

계란도 쌀도 귀하던 시절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하루의 모든 시간이 먹기 위해 전투를 치르듯 치열하기만 했다. 식량이 귀한 춘곤기가 지나고 뜨거운 여름 지나면 논에 누렇게 벼이삭이 익어간다. 여름 내내 새까맣게 그을린 아버지 얼굴에 여유와 웃음꽃이 피는 시기다. 벼를 베어 묶어 말리고 낟알을 훑어 다시 말린다. 벼 가마니가 집 마당 처마 아래로 옮겨지면 가마니 높이만큼 아버지의 어깨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었다.

그 무렵엔 계란을 먹지 못해도 계란밥은 먹을 수 있었다. 아버지는 닭장에서 꺼내 온 계란 맨 위쪽을 조심스럽게 콕콕 깨서 속에 든 흰자와 노른자로 계란후라이를 부쳤다. 그 계란후라이는 할머니 밥상에 오를 것이고 다시 오빠 밥그릇에 옮겨질 것이다. 아버지는 알맹이가 쏙 빠진 계란껍질에 불린 쌀을 반쯤 채우고 소금 몇 알 집어넣고는 아궁이 잔불에 묻어놓았다. 한참 있다가 잔불을 헤집어 묻어 둔 계란을 꺼내 껍질을 벗기면 고소한 계란밥이 되어 있다. 아버지가 벗겨주신 계란밥을 호호 불어가며 먹으면 계란후라이 못지않게 맛있었다. 아버지는 계란후라이를 먹지 못하는 우리 남매에게 계란밥을 따로 만들어주셨다.

농사일이 없는 늦가을과 이른 봄까지 아버지는 바다에 그물을 던져두었다가 물이 빠지면 그물을 털어오셨다. 그물에는 낙지며 새우, 숭어, 망둥어 등 온갖 것들이 걸려들었다. 아버지를 따라 간 날엔 굵은 낙지다리 하나를 뚝 끊어 내 손에 쥐여 주셨다. 그걸 입에 넣고 질겅질겅 씹으면 낙지다리가 살아서 콧구멍과 눈두덩을 휘젓곤 했다. 전어가 많이 나올 땐 아궁이 잔불에 전어를 구웠다. 노릇하게 구운 전어대가리는 떼어 당신 앞에 두시고 몸통은 우리에게 한 마리씩 나눠주셨다. 살점은 자식들 먹이고 당신은 남은 대가리로 배를 채우셨다.

긴긴 겨울밤, 잠은 오지 않고 배가 고팠다. 아버지는 방 윗목에 저장해 둔 고구마를 꺼내 구워주기도 했고, 비닐포대에 담아 땅에 파묻어 둔 무를 꺼내와 깎아주시기도 했다. 눈 속에서 꺼내 온 무는 배처럼 달고 아삭했다. 어머니는 그런 우릴 보면서 귀찮은 표정을 지었지만, 장난기 많은 아버지는 항상 우리와 한편이셨다. 찬밥에 김장김치 송송 썰어 참기를 넣고 비벼 먹을 때마다 아버지는 참기름 많이 먹으면 훗날 시집가서 가난하게 산다고 진지하게 말씀하셨다. 귀한 참기름을 아끼라고 하신 말인 줄 알면서도 지금도 나는 참기름을 부을 때마다 손이 떨린다.

가난했던 그 시절, 마음껏 잘 먹진 못했어도 아버지의 따듯한 마음을 매끼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다. 우리가 자라는 동안 한없이 퍼주기만 했던 아버지는 너무 일찍 우리 곁을 떠나셨다. 이제는 내가 아버지께 맛있는 것 해드릴 수 있는데 곁에 계시지 않아 슬프다. 아버지가 곁에 계신다면 내 손으로 계란밥을 지어드리고 싶다. 침을 꼴딱꼴딱 삼키며 기다리는 어린 것들을 바라보며 그 거친 손으로 뜨거운 계란껍질을 급히 벗겨내던 아버지, 자식 입에 밥 들어가는 걸 보시며 흐뭇하셨을 내 아버지…,

올해는 아이들과 고향집 아궁이에 둘러앉아 계란밥 지어 먹으며 내 아버지를 한껏 그리워해야겠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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