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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국 구형왕이 떠난 빈대궐터 함양 ‘등구사’ 학술보고회

기사승인 [107호] 2023.01.29  18: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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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자료·정밀지표조사 기반으로
가야유적의 여부 및 성격 재규명
구형왕 관련 지명들 지금도 존재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근거자료들
활용할 수 있는 기반확보 마련해

가라국이 멸망하기 직전에 창건한 사찰 함양 등구사지(登龜寺址) 학술조사 최종보고회가 지난 16일 함양사회복지회관에서 열렸다.

이날 보고회는 등구사 인담스님을 비롯해 함양사암연합회장인 도오스님, 벽송사 주지 만일스님, 해인사 전 회계담당 보관스님, 견불동 진연스님 등과 관계자 20여명이 참석해 등구사의 문헌자료와 정밀지표조사 내용을 기반으로 가야유적의 여부 및 유적의 성격을 재규명했다.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소장 중인 등구사 사적기(登龜寺 事蹟記)에 따르면 등구사는 656년(신라 태종 무열왕 2년)에 창건됐고, 고려말 조선초에 소실됐다가 1709년 행호선사와 탄기(坦機), 자상(慈祥), 초익(楚益), 초학(楚學) 등의 스님에 의해 중창됐다.

등구사는 1489년 조선시대 김일손(1464~1498)의 두류기행록(頭流紀行錄)에 실려 있어 당시에도 사찰의 운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등구사가 오도봉(悟道峰) 아래에 있다고 했으며, 유호인(1445~1494)의 시에도 등구사가 향화를 피웠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후 1765년의 여지도서輿地圖書), 1799년 발간된 범우고(梵宇攷)에는 금무(今無), 금폐(今廢)로 실려 있어 1708~1779년 사이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등구사지(登龜寺址) 학술조사 최종보고회 모습.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등의 조사를 보면 사역에는 거대한 석축과 배수구, 경남문화재 자료인 삼층석탑 부재, 상단구역의 주초, 장대석, 나비장이 새겨진 석조물, 기와 조각, 도자 조각 등이 산포되어 있다.

그리고 등구사에서 간행한 등구사 사적기(1716년), 1685년 발간된 묘법연화경을 비롯한 경전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등구사에는 청동 아미타불 좌상과 목조지장보살, 관음보살을 봉안한 인법당([因法堂), 불사 중인 금당, 귀한선원(龜閑禪院) 등의 당우가 있다.

등구사터에는 9세기 신라시대에 조성된 삼층석탑이 있다. 이 석탑은 1979년 장충식 교수에 의해 학계에 알려졌는데 오랫동안 방치되어 왔고, 도굴 흔적이 뚜렷하며, 석탑의 윗부분이 많이 훼손된 상태로 2층의 기단 및 1층 탑신부만 확인된다.

2층의 기단에는 가운데 탱주(撑柱)가 있고 1층 탑신의 몸돌 모서리에는 우주(隅柱)가 잘 다듬어져 있다. 비록 1층밖에 남지 않았지만 옥개석의 받침은 4단으로 되어 있고 옥개석 처마의 네 귀퉁이는 날렵하게 하늘로 치솟아 있어 뛰어난 조형미를 보인다. 삼층석탑은 2000년에 복원했고, 2012년 3월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47호로 지정됐다.

등구사에는 보물 제2109호로 지정된 ‘미륵원명 청동북’이 있다. 비교적 큰 크기와 뛰어난 조형성, 우수한 주조기법 등을 가지고 있는 중요한 고려시대 작품으로 2021년 1월 보물로 지정되어 등구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청동북은 1190년(고려 명종 20) 충남 공주 미륵원에 걸기 위해 제작한 청동북으로 제작시기, 제작기법, 사용처, 무게까지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로 사료적 가치로도 뛰어나다. 미륵원은 공주 차현(차령) 인근 사찰로 지금은 기록만 남아 있다.

이밖에도 등구사지에서 발굴되었으나 반출되어 현재는 행방이 묘연한 청동 관음보살입상이 있다. 청동상은 11면 관음이 아니라 9면 관음으로 조선초기 작품으로 추정되며 보관에는 화불을 배치했고, 양쪽 귀 옆으로 고리형의 관대가 있다.

오른손에는 염주를 지고 있으며, 정병을 든 왼손은 가슴에 두었다. 팔 좌우에 길게 흘러내린 천의(天衣) 자락은 끝에서 잘려나갔다. 목걸이를 착용했고, 팔목에는 팔찌를 패용했으며, 화려한 전신영락 장식이 3단으로 늘어져 있다. 조선초기의 양식 특징을 지니고 있어 등구사 연구에 중요한 단서가 되는 유물이다.

특히 등구사에는 사찰 조성 전 가야시대 구형왕 관련 빈대궐터, 동굴 등의 전설이 전래되고 있다. 구만(九萬)은 가락국 구형왕이 9만 대군을 거느리고 와서 주둔했다가 오도재를 넘어갔다고 하여 지어진 지명으로 함양읍 구룡리 구만마을이 여기에서 비롯됐다. 군자(君子)는 진평왕이 기도하여 왕자를 얻었다고 하여 군자동이라 했으며, 왕이 돌아간 뒤에는 군자사라는 절이 있었다. 지금 마천면 군자마을이다.

두지터는 추성마을 남서쪽에 있는 마을로 가락국 구형왕이 추성에 있을 때 곡식을 저장하였던 곳이다. 등구는 주변의 산 형태가 거북이 산으로 올라가는 형국이라 하여 지어졌다. 빈대궐터는 구형왕이 이곳에 와서 대궐을 짓다가 신라군의 침공으로 추성으로 이동하였다는 이야기에 따른 지명이다.

등구사 주지 인담스님은 “등구사지는 사찰 조성 전 가야시대 구형왕 관련 빈대궐터, 동굴 등의 전설이 전래되고 있어 문헌에서 나온 기록과 출토유물에 대한 규모를 밝히기 위해 정밀지표조사와 학술조사를 하게 되었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열린 최종보고회는 등구사지에 대한 이런 성과들을 담아 향후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관리와 보존방안 마련을 위한 근거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확보하는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영철 기자 achimstory@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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