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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눈물 젖은 두만강

기사승인 [107호] 2023.01.29  17: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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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복희 산청군 단성면 거주.

“두만강 푸른 물에, 으흠! 노 젓는…, 첫째야! 흘러간 그 옛날에 내님을 싣고, 둘째야! 떠나간 그 배는 어디로 갔소. 조호타! 에헴, 우리 딸래미 셋째야!”

거나하게 취한 아버지가 멀리서 오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어릴 적 우리 집은 신작로 근처에 있었다. 아버지는 신작로가 비좁다는 듯 갈지자를 그리며 큰소리로 노래와 자식들 이름을 섞어 부르며 집으로 오셨다. 집에 와서도 우리에게 “아버지가 한잔했다. 에헴!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를 연발하며 노래를 부르곤 하셨다.

아버지는 스물한 살에 결혼했다. 그 당시는 경찰공무원이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공무원을 그만둔 아버지는 얼마 되지 않은 농사를 지어 생계를 이어갔다. 작물을 심어 커가는 모습을 보면 자연스레 다른 집과 비교가 되기 마련이다. 농사일이 몸에 배지 않은 아버지가 어쭙잖아 보여 어머니는 자주 볼멘소리를 했다. 그 소리가 듣기 싫어 두 분은 자주 말다툼을 했다.

아버지는 시간이 나면 강에서 물고기잡이를 즐기셨다. 비위가 약한 어머니는 비린내 나는 생선을 싫어해 아버지가 직접 요리했다. 물고기를 손질하는 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물고기 뼈를 추려내고 살만 골라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그게 좋아서 아버지가 물고기를 잡아오면 같이 요리하고 맛있게 먹기도 했다. 그 영향인지 지금도 민물고기 요리는 뭐든 좋아한다.

한번은 여름에 큰비가 오고 난 뒤 강물이 넘쳤다. 불어난 강물에 피신 나온 물고기를 잡으러 아버지를 따라간 적이 있다. 수풀이 우거진 곳에 족대를 대놓고 풀을 발로 밟으면 족대 안으로 물고기가 들어왔다.

겨울에는 큰집에 친척들이 모여 즐겨 놀았다. 갖은 음식을 만들어 먹었는데 그중에 피리회가 최고였다. 아버지와 어른들이 강에서 피리를 잡아오면 큰어머니와 친척여자들은 요리를 했다. 큰 다라이에 채썬 무를 산더미처럼 넣고 새콤달콤 회무침을 한다. 그 많던 피리회는 어른들 술안주와 아이들 밥반찬으로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요즈음은 디스토마가 무서워 먹지 않지만 그때는 물이 맑아 그런 걱정이 없었다. 추억의 음식을 먹지 못하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맛있는 피리회에 술이 한 순배 돌다보면 어른들은 장구를 치고 춤을 추며 놀았다. 아버지는 장구장단에 맞춰 ‘눈물 젖은 두만강’을 구성지게 불렀다.

이십이 년 전, 아버지는 예순아홉 나이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 혹여 오진이길 바라며 다시 검사를 받으러 우리 집에 오셨다. 두 번째 찾아간 병원에서도 같은 병명임을 확인했다. 아버지는 병원에 들어가기 전 내가 사드린 바다 회를 맛있게 드셨다. 그리고 육 개월 투병 끝에 우리 곁을 떠나셨다.

여섯 식구 가장으로 힘에 부친 농사일을 해내며 평생을 살아오신 아버지, 한때 잠시나마 홀로 객지에 나가 리어카 장사를 하기도 했다. 삶이 힘들고 고단할 때면 한 잔의 술과 눈물 젖은 두만강에 의지하여 집으로 들어오시던 아버지가 문득 그리운 날이다. 맘속으로 아버지 그 노래를 흥얼거려본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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