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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가조·가북 기미독립만세 운동가 미서훈 유공자

기사승인 [93호] 2022.06.21  22: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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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영석 거창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거창 54명의 독립운동가 배출
20명은 아직 서훈 받지 못해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 목적

거창 기미독립만세운동 학술대회 개최를 기념하며 발제와 토론자, 구인모 거창군수 등 관계자들이 군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사진: 거창군>

거창군은 15일 군청 대회의실에서 거창의 기미독립만세운동과 관련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군은 이 시기에 활동했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여 미서훈 독립운동가의 발굴을 위해 연초부터 야심차게 준비했다. 학술대회는 3개의 주제 발표로 △조익현 거창군사 근현대사 집필위원 ‘거창의 기미독립만세운동의 전개와 그 의의’ △김영석 거창역사문화연구소 소장 ‘가조·가북기미독립만세 운동과 미서훈 유공자’ △홍순권 동아대학교 명예교수인 홍순권 교수 ‘독립운동가 서훈 신청을 위한 준비와 제언’으로 진행됐다.

학술대회 종합토론에는 김길수 경상대학교 명예교수, 김희주 한국국제대학교 교수, 박철규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관장이 참여했다. 종합토론이 끝난 뒤에는 현장에 참가한 방청객 및 유튜브 채팅 참여자들과의 질의응답 시간을 가졌다. 거창군은 54명의 독립운동가를 배출했고, 그중에서 20명이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김영석 소장의 발제문을 일부 발췌해 게재한다. <편집자주>


한말 덕유산과 가조를 중심으로 한 거창 항일 의병들의 줄기찬 투쟁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일제의 야만적인 식민통치의 지배 아래 놓이게 되었다. 일제의 식민지 침략정책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을 만큼 가혹한 것이었다. 1910년 8월 조선을 병합한 일제는 먼저 조선의 경제를 일본 자본주의에 예속시키고 한민족을 수탈·억압하기 위하여 지배기구 및 통치체제를 본격적으로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1910년 8월 27일 거창경찰서와 거창헌병분대를 설치하여 거창의 행정·사법뿐만 아니라 교육·경제 등에도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였다. 이들은 특히 지방행정관료들과 함께 1910년대 일제의 수탈정책인 토지조사사업에 몰두하여 거창의 토지수탈에 광분하였다. 따라서 거창민중들은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문전옥답을 일제통치기관인 조선총독부에 빼앗기게 되자 그 원한이 뼈에 사무치게 되었다.

1910년 1월 22일 고종황제가 일제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소문이 돌자 온 강토는 비통의 도가니에 빠지게 되었다. 이에 거창에서도 고종의 승하를 뒤따라 2명의 순사자(殉死者)가 나타났으니, 바로 이주환(李柱煥) 의사(1월 30일 卒)와 윤봉의(尹鳳儀) 의사(2월 7일 卒)다. 이 두 의사들의 순국은 거창 3·1운동을 주도한 거창 향촌사회의 유생들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거창 가조는 비록 서부 경남의 오지이긴 하나 산고수려한 절승의 고장이다. 따라서 명인(名人) 거유(巨儒)가 많았고 유림(儒林)의 선비들이 많은 고장이기도 하다.

가조의 김호(金護), 오문현(吳文鉉), 어명우(魚命佑) 등과 가북의 김병직(金秉直)도 이 고장 유림의 지사(志士)들이다. 이들은 한말(韓末)의 기우는 국운을 눈여겨보았고 을사늑약(乙巳勒約) 이후의 망국 통한을 가슴 아파하였다. 경술년(庚戌年)에 기어이 합병이란 명목으로 국권이 상실되자 호곡하여도 시원치 않았고 절치통분하여 우국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1919년 1월 황제(皇帝)의 시해 소식이 전해지고, 2월 1일 주상면 연교리의 이주환(李柱煥) 열사가 거창읍 침류정에서 자결순국(自決殉國)하고, 3월 5일 하당 윤봉의(尹鳳義) 지사가 남하면 안흥서당에서 자결(自決)하니 이 고장 유림들의 충격은 말할 수 없이 큰 것이었으며 일본에 대한 증오의 불길로 가슴이 터질 듯하였다.

기미년(己未年) 3월 1일 학정에 시달리다 못해 한민족은 봉기하였다. ‘대한민국만세(大韓民國萬歲)’라는 민중의 함성은 삼천리 금수강산 방방곡곡으로 메아리쳐 요원의 불길인 양 번져가기 시작하였다.

3월 11일 김천 황금정 교회 조사 김충한이 주도한 거사가 사전 발각되어 무산되어 이에 관계한 김호의 인척 강두문)이 이곳 가조로 피신하여 외지의 만세운동에 대한 소식을 전해 듣고 그들로서는 무한한 감격과 흥분을 감출 길이 없었다. 생각하면 참으로 통한에 찬 길고도 긴 10년의 세월이었다.

김호(金護), 오문현(吳文鉉), 어명우(魚命佑), 이병홍(李秉洪), 김호(金浩), 신병희(愼炳禧), 김익동(金翼東 김호의 친척), 김관묵(金寬黙 김호의 이질), 등은 굳은 맹약(盟約)으로 기의(起義)할 것을 다짐하였다.

3월 19일(음 2월 18일) 그동안 엄밀하게 거사를 준비해온 김호, 오문현, 어명우, 이병홍, 김호(金浩), 신병희, 김익동, 김관묵 등 지역의 유지 50여명이 가조면 석강리 정자나무 아래 집합하여 비밀회의를 가졌다.

이들은 3일 뒤인 22일 거창읍 장날을 기하여 거사하기로 결정하고 조직적인 만세시위를 위해 문중대표 5인을 선출하여 책임을 분담하여 가조·가북면의 각처의 유지와 주민들에게 이 거사계획을 알리고 많은 군중이 동원되도록 5개 항을 결의하였다.

■ 결의 내용

1. 대표자를 선정하고, 그중 5인의 책임대표를 선정함.

1. 3월 22일(음력 2월 21일) 거창 장날을 기하여 독립만세를 높이 외치고 일본헌병대를 습격할 것.

1. 오늘 3월 19일(음력 3.18) 야간을 이용하여 본 면내 각 마을에 이 사실을 주지시켜 소정 기일에 일제히 동원할 것.

1. 3월 22일(음력 2월 21일)오전 11시까지 만학정 정자나무 아래 일제히 집합할 것.

1. 본 면내 사람으로 이 운동에 불참한 자가 있을 때에는 엄중 문책할 것.

오문현(吳文鉉), 어명철(魚命喆), 최영순(崔榮淳). 김호(金浩), 김채환(金采煥). 선출된 5인 명단은 자료와 증언자마다 약간씩 엇가리고 있다. 독립기념관 독립유공자 공훈록에 따르면 어명철은 “오문현(呉文鉉) 오문현(呉文鉉) 신병희(慎炳禧) 어명우(魚命佑) 이병홍(李秉洪) 김호(金護) 등과 함께 대표로 뽑혀 밤을 새워가며 주민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는 책임을 맡았다”라고 되어 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김병직(金秉直)과 어명준(魚命俊)은 3월 20일 가조 장날을 기하여 거사키로 밀약하고 3월 20일 두메산골 가조장터에도 삼삼오오 장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자 정오경 장꾼들이 500여명이 모여들자 태극기를 높이 들고 시장중앙으로 달려 나가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였다.

장꾼들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일제히 호응하여 ‘대한독립만세’를 합세하였다. 이들은 시장을 빠져나와 용산 일군헌병분견소로 달려가 일군헌병들이 장기리 시장의 독립만세운동을 진압하기 위하여 출동하고 없는 사무실의 문서와 유리창과 기물을 닥치는 대로 때려 부수고 파손하였고, 사무실로 돌아온 일군 헌병들과 난타하며 격투를 사력을 다하였지만 총칼을 들이대는 헌병들에게 당할 수는 없었다. 헌병들은 두 사람을 반죽음이 되도록 고문하였다.

그러는 한편 뜻밖에도 전술한 결의내용 정보가 누설되어 22일 아침 거창 일군 헌병분견대는 삼엄한 경계를 펴고 주동자로 김채환, 김호, 오문현, 어명철, 최영순 등을 구인하여 엄중한 취조를 하고 있었다.

거창군은 15일 군청 대회의실에서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과 관련하여 미서훈 독립운동가의 발굴과 독립운동의 중요성을 일깨우기 위한 학술대회를 열었다. 거창군은 미서훈 독립운동가의 발굴을 위해 연초부터 야심차게 준비했다. <사진: 거창군>

이 소식이 삽시간에 전파되어 가조·가북의 주민 3000여명은 오후 2시경 곤봉과 죽창을 가지고 장기리 만학정(晩鶴亭)앞에 모여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하니 그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이들이 동지들을 취조 중인 헌병들에게 그들의 석방을 강요하니 그 기세에 눌려 겁을 먹고 일단 그들을 석방하였다.

시위 군중은 이렇게 동지구출에 성공하자 그 여세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거창읍으로 향하여 시위행진을 계속하였다. 시위행렬이 살피재를 넘어 둔마리 앞에 이르렀을 때 이미 거창 일군 헌병대와 용산 일군헌병분견소가 합세하여 시위군중의 진로를 차단하고 총검으로 위협하며 해산을 명하였다. 그러나 노도처럼 밀리는 성난 군중이 이에 응할 리 없었다.

시위 군중들이 쉽사리 물러나지 않자 그들은 선두의 군중에게 총칼을 휘둘러 난타하기 시작하였다. 군중들도 이에 대항하여 함성을 지르며 일군 헌병들을 향해 돌진하였다.

이때 잔인무도한 일군 헌병들은 일제히 총격을 가하였다. 맨주먹 시위군중들은 아비규환의 수라장을 이루고 사방으로 흩어졌으나 선두에서 용감하게 돌진하던 신문구(愼文九), 조이록(曺二錄), 이석종(李錫宗) 등은 적의 총탄에 장렬하게 순국하였고, 배영환(裵永煥)은 3월 26일, 허경두(許瓊斗)는 복부 아래 관통상을 입어 수개월 신음하다가 6월 4일 순국하였다. 그리고 최학서(崔鶴西), 최상선(崔尙善)은 왼팔에 관통상을, 이점준(李点俊), 문철주(文哲周)는 다리에 관통상을 당하여 불구자가 되었다.

2차에 걸친 가조.가북의거의 주동자로 검거된 김병직, 어명준, 김호, 어명철, 김관묵, 김익동, 이병홍, 강두문(일명 강두몽) 등 많은 사람이 혹독한 고문을 받은 후 재판에 회부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22일 의거 때는 최학서, 최상선, 이점준, 문철주 등 부상자가 많았으나 일본 헌경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자가 치료를 하여 그들은 화를 면하였다. 그 외에도 고문(拷問) 및 태형(笞刑)당한 인원은 무려 약 100여명에 달하였다.

위의 사실에 대해 일부에서는 가조면 3·1의거약사(1964년)와 3·1운동비사(1959년 이병헌)에 근거하여 가조·가북 3·1의거는 3월 22일(음 2월 21일) 거창장날 1회이며, 용산일헌병분견소 유리창 파괴 등은 3·1운동비사에 3월 27일로 기록되어 있어 3월 20일 의거는 사실과 다르다고 주장하고 있다.

조선헌병대사령부의 ‘대정8년 조선소요사건상황’에 따르면 “3월 20일 가서면(현재의 가조면) 장기리에서 약 300여명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개시하였다. 이는 거창군 소요의 처음이다. 같은 달 22일 같은 곳에서 약 2000명의 성난 군중들이 거창 읍내를 향하여 내달았다. 이들은 흉기를 가지고 몹시 흉악하고 사납게 출몰했다. 이에 발포하여 진정시켰다. 소요는 처음 발생 이래 2회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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