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아, 우리 거제야!

기사승인 [93호] 2022.06.21  21:55:28

공유
default_news_ad2
박기숙 산청지리산도서관 글쓰기 회원.

내 고향은 거제도이다.

박 씨 집안에 귀한 첫딸로 태어났다. 큰아버지께선 나를 당신 딸로 삼고 싶어 하셨다 한다. 아들만 다섯인 집안에서 여섯 번째로 딸을 낳았으니 그럴 법도 했다.

아버지께선 배를 타셨다. 고등어잡이 선장으로 무서운 파도와 평생을 싸우셨다. 오랜만에 집에 오시는 아버지는 제주도 귤을 박스 채 사오시기도 했다. 아버지가 오시는 날은 우리 집은 먹을거리가 넘쳤다. 그때는 무뚝뚝하신 아버지가 낯설기도 했지만 친구들에게 자랑도 하고 싶었다.

고향을 생각하면 여름밤 평상과 흑백텔레비전이 생각난다. 여름밤에 마을사람들이 우리 집으로 연속극과 김일 박치기를 보러왔다. 동네사람들과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연속극을 보았다. 가끔 정전이라도 되면 안타까운 탄식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겨울엔 우리 집 안방에서 동네사람들과 텔레비전을 봤다. 나는 그 고약한 발 냄새를 참아야 했다. 보건소에서 이빨을 뽑은 날엔 참기 힘들었다. 치통에 발냄새까지 죽을 맛이었다. 엄마가 찬물을 머금고 있으면 좀 낫다고 했다. 입안에 머금은 찬물은 금방 더운물이 되었다. 그렇게 연속극이 끝날 때까지 참아야했다. 세월이 이렇게 흘러 멀지 않는 내 고향 거제를 하루 여행으로 다녀오기도 한다.

‘거제의 자랑’이라는 노래가 있다. 거제의 선각자 무원 김기호 선생 작품으로 6·25전후 불리었던 노래라고 한다. ‘거제의 자랑’을 아버지가 즐겨 부르셨다. 지지난해 폐암으로 천국 가신 아버지가 생각난다. 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그리움이다 이것은.

아버지는 낙천적이시며 유머를 좋아하셨다. 돌아가시기 6개월 전쯤 아버지와 이 노래를 부르면서 거제를 갔다. 할머니, 큰아버님 산소를 둘러보시고 큰집 뒤뜰도 둘러보셨다. 마지막 인사를 하신 것이다. 먹먹한 가슴으로 아버지를 부축해드렸다.

‘거제의 자랑’ 노랫말은 이렇다. 일 년 열두 달, 거제 자랑꺼리를 늘어놓고 후렴으로 ‘아, 우리 거제야!’를 힘차게 다 같이 불러야한다. 아버지께서 선창하시면 우리는 후렴을 받아 불렀다.

“정월이로다. 정든 땅 어디던고 내 고장 거제, 태평양 정기 받아 아득한 고향.”

“아! 우리 거제야!”

“소리 작다, 크게!”

우리는 계속 ‘아, 우리 거제야!’를 반복했다. 정작 본인은 가사가 불분명하셨다.

내가 살던 고향 거제도에는 친가도 외가도 있었다. 그래, 지금은 ‘있었다.’이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가슴을 파고 들어온다. 행복했다 하시고, 병을 못 고치고 가는 것이 미안하다 하셨다.

오늘은 ‘거제의 자랑’ 노랫말을 친필로 적어놓은 아버지의 노트를 찾아 펼쳐본다. 노트 맨 앞장에 멋진 글씨체로 정성껏 12월까지 적어놓으셨다. 이렇게 고향생각이 아버지의 노트에까지 왔다. 1월부터 12월까지 거제의 자랑을 가만가만 불러본다.

‘동짓달이로다. 동백꽃 붉게 피는 내 고향 거제, 면면촌촌 곳곳마다 풍경도 좋다.

아, 우리 거제야!’

고향을 떠올리다보니 온통 아버지 생각뿐이다. 내 유년시절 추억이 고스란히 있는 그 곳, 아버지의 고향 거제도!

“아버지, 잘 계시지요? 박현철 울아부지!”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