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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받은 최고의 선물

기사승인 [91호] 2022.05.24  11: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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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설아 산청 방목리, 전직 초등교사.

올해로 꼭 60년을 살았다. 60년을 살면서 얼마나 많은 선물을 받았을까 생각해보니 이루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참으로 고맙고 감사한 세월이었다.

30년 넘는 교직생활을 하면서 해마다 스승의 날이 되면 고사리 같은 손으로 쓴 편지며 카네이션을 받았다. 막내를 가진 만삭의 몸으로 사정상 장거리 통근을 하던 1996년의 생일에 터미널 앞에서 백합 꽃다발을 들고 기다리던 남편과 두 딸,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난다.

올해에는 환갑이라며 아이들이 두둑한 용돈과 케이크, 꽃다발, 지인들과 나누어 먹으라며 떡을 준비해 왔으니 이 또한 감사하고 감사한 일이다. 그렇지만 내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선물이 있으니 그건 바로 할머니와 부처님과의 만남이다.

지금은 뵙고 싶어도 뵐 수 없는 우리 할머니다. 할아버지는 일찍 돌아가시고 할머니 홀로 8남매를 키우셨다. 그때는 먹을 것이 없어서 쑥으로 무로 밥을 해먹으면서 힘들게 사셨다. 8남매 장남인 우리 아버지의 첫 번째 아이가 바로 나였으니 얼마나 예쁨을 받았는지 모른다. 늘 할머니 등에서 놀고 고모들과 삼촌들의 손에서 자랐다. 그러는 동안 어머니의 시름과 근심은 내가 받는 사랑에 비례해서 컸던 것 같았다. 어머니는 할머니와 고모들의 핍박과 시집살이에 지쳐 도망갈 궁리를 수백 번도 더했다고 했다. 나를 그렇게나 예뻐하면서 며느리한테는 왜 그렇게 모질었는지 지금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 세월 속에서 할머니는 절에 가실 때마다 나를 데리고 가셨다. 어릴 때는 업고서, 조금 자라서는 손을 잡고 갔다. 할머니를 따라가 부처님을 만나고 스님을 뵙는 과정에서 서서히 부처님께 스며들었던 것 같다.

세월이 흘러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도움의 손길이 필요했다. 그럴 때마다 아무 조건 없이 그저 달려와서 산후조리부터 육아까지 8년을 동고동락해 주신 분이 할머니다. 밤에 잠을 못 자면 직장생활에 지장이 있고 힘들어서 안 된다며 당신이 직접 아이를 데리고 주무시고 빨래며 살림까지 다 해주셨다.

그때만 해도 천기저귀를 사용해서 매일 삶아야 했고, 3구 3탄의 연탄불을 수시로 갈아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연세가 70이 넘은 분이 어떻게 해내셨는지 상상이 안 간다. 그 와중에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비녀로 쪽진 백발을 정갈하게 다듬고는 정좌하고서 관세음보살을 명호하셨다. 마지막은 언제나 ‘잠자듯이 죽게 하소서. 죽은 잠에 가게 하소서’였다. 그때는 그 말이 듣기 싫어서 제발 하지 말라고 짜증을 부리기도 했다.

할머니는 80이 넘어 눈이 잘 안보이고 귀도 멀기 시작하면서 고향인 고성으로 가셨다. 그러다가 91세로 평소 본인이 염원했던 것처럼 아프지도 않고 식음을 폐하시고는 불경이 고요히 울리는 당신의 방에서 정말 편안히 가셨다.

나는 살면서 힘이 들 때마다 부처님을 찾아뵙고 할머니를 떠올린다. 그러면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낀다. 우리 할머니여서 고맙고 그런 할머니를 만난 인연에 감사하고 그 인연으로 부처님을 뵐 수 있어서 감사하고 감사한 내 생이다.

할머니 생전에 못해 본 말을 오늘 이렇게 그리움으로 외쳐본다.

‘할머니 사랑합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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