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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함양 민간인학살사건 ‘끝나지 않은 국가의 책임’

기사승인 [78호] 2021.11.08  21:2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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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7일 정월 초이틀
‘설’ 명절 기분도 가시기 전에
산청·함양에서 705명 희생
불과 하루 만에 일어난 참극

산청·함양 민간인학살사건 705명의 희생자 가운데 남자는 60~70세를 넘긴 고령자가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부녀자와 100여명의 어린이까지 끼어 있었다. 산청·함양사건 추모공원에서 한 유족이 묘비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사진: 함양군>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인민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왔으나, 국제연합군의 참전으로 인민군은 후퇴하기 시작했고,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전개되어 인민군의 북상이 차단되자 그 패잔병들은 지리산 등 산악지역으로 들어가 지방 공비들과 합세하여 지리산 주변 민가에서 식량을 조달하며 후방교란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1950년 8월 빨치산 소탕작전을 전담할 육군 11사단을 창설하여 사단사령부를 남원에 두고, 그 예하부대로 전북 전주에 13연대, 전남 광주에 20연대, 경남 진주에 9연대를 배치했으며, 9연대는 예하부대로 함양에 1대대, 하동에 2대대, 거창에 3대대를 배치하여 공비토벌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1951년 2월 7일(음력 정월 초이틀) 새벽 3대대 병력은 연대 합동작전의 일환으로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 가현마을로 진격하여 마을을 포위하고 가가호호 뒤져가며 사람과 가축을 몰아내고 가옥은 불태웠다. 군인들은 약 2㎞ 떨어진 방곡마을로 내려가 당일 오전 9시에서 12시 사이 가현에서와 똑같은 방법으로 주민들을 몰아낸 뒤, 마을 앞 개천가 논바닥에 집결시킨 후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3대대 병력은 계속하여 경호강 방면으로 진격하면서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자혜리와 함양군 유림면 서주, 손곡, 지곡마을 등을 돌면서 주민들을 얼어붙은 서주리 동천강변 자갈밭으로 시국강연을 개최한다는 빌미로 불러 모았다. 오후 4시 30분께 집결한 주민들 중 군경가족을 빼돌리고,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이때 희생된 주민들의 총수는 방곡마을 231명, 가현마을 132명, 점촌마을 45명, 서주리 일대에서 310명이었다. 1951년 2월 7일 불과 10시간 동안 이 일대를 휩쓴 참극으로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주민 705명이 목숨을 잃은 것이다. 당시 학살당한 민간인 700여명 중 남자는 60~70세를 넘긴 고령자가 대부분이었고, 나머지는 부녀자와 100여명의 어린이까지 끼어 있었다.

그중 1998년 2월 17일 특별조치법에 의해 확인, 등록된 희생자는 14세 미만 어린이가 147명(38%), 남자 189명(49%), 여자 197명(51%), 총 386명이다.

위령제를 마친 유족이 상념에 잠겨 있다.

◇ 민증식(당시 54세, 산청군 오부면 양촌리)씨의 증언- 1991년 ‘부산매일신문’

민증식 씨는 40년 동안 한 번도 고향을 밟지 않다가 이날 처음으로 학살의 현장을 찾았다. 그는 당시의 상흔으로 두 발목이 모두 잘려나간 채 통한의 세월을 40년 이상 지내온 생존자이다. “당시 9살이었지요. 윗마을인 가현에서 총소리가 나자 젊은 남자들은 모두 피난을 갔습니다. 마을엔 할아버지 할머니 아낙들과 어린애들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군인들이 이른 아침 들이닥치면서 ‘좌담회가 있으니 집안의 쓸만한 물건들을 들고 마을 앞 논두렁으로 모이라’고 했지요. 마을 주민들을 강제로 끌어낸 군인들은 남자와 여자를 갈라 세우고 남자들은 아랫논으로 모이게 한 후 먼 산 쪽을 보라고 하더니 갑자기 콩 볶는 소리가 났습니다. 당 시 겁에 질려 있다가 한참 만에 눈을 떠보니 주위는 온통 시체들로 깔려 있었고, 어떤 시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삼베조각처럼 산산조각이 나 있었죠” 학살사건 후 민 씨는 기적적으로 생존하기는 했으나 그의 어머니 누나 동생 2명 등 일가족은 몰살되었고, 민씨 마저 총에 맞아 두 발목이 잘려나간 채 죽음 직전까지 놓였었다.

산청·함양사건 추모전시관에 마련된 전시물.

◇ 김분달(당시 62세, 산청군 금서면 방곡리)씨의 증언- 1991년 ‘부산매일신문’

방곡리 참살 때 민씨와 함께 기적적으로 생존한 김분달 여사의 증언이다. “군인들이 아낙네들 보는 앞에서 남자들을 먼저 죽였습니다. 그 다음 군인들은 여자들 쪽으로 와서 앞산을 보고 앉으라고 했습니다. 이제 죽었구나 싶었지요. 내가 안고 있던 5살 먹은 딸애를 품고 앞으로 엎드렸습니다. 그런데 총소리가 나더니 딸애를 감싸 안고 있는 내 손가락이 잘려 나가고 총알이 내 딸의 머리를 관통했습니다.” 당시 22살로 새댁이었던 김 여인은 방곡리 학살로 시어머니와 시아버지 5살짜리 딸애를 모두 잃고 말았다. 그야말로 부초 같은 생활을 계속하다 어쩔 수 없이 그 끔찍한 학살의 현장에서 지금까지 산증인으로 살고 있다. 김분달 여인이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것은 잃어버린 어린애들이었다며, “마침 명절 때라 친척집에 놀러온 애들도 있었지요. 군인들이 총칼을 들이대며 일렬로 줄을 서라니까 무슨 좋은 선물이라도 주는 줄 알고 서로 희희낙락거리며 앞에 서려고 애쓰던 그 천진난만했던 모습들이 아직도 가슴에 찡하게 남아 있다”고 술회하며 “공비들도 임신한 여인네나 어린애들은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국민의 군대인 국군이 자신들의 동생 아들 딸 같은 그 천진한 애들까지 무슨 죄가 있다고 총을 겨누고 죽였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아마도 짐작컨대 그들은 사람이 아닌 짐승이었을 겁니다” 김 여사의 한 맺힌 절규는 끊일 줄 몰랐다.

이영철 기자 achimstory@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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