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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민간인학살사건 ‘전국 최초로 확정 판결 이끌어’

기사승인 [78호] 2021.11.08  21: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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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1년 2월 9일부터 11일
신원면에서 719명 희생
전국 최초로 판결 이끈 사건
장소는 국가등록문화재 추진

1960년 5월 국회 진상조사단이 확인한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의 희생자는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 84명, 대현리 탄량골 100명, 과정리 박산골 517명, 기타 지역에서 희생된 18명 등 총 719명으로 되어 있다. 지난해 10월 거창사건 추모공원 역사교육관이 2004년 준공된 후 16년 만에 리모델링을 완료하고 재개관했다. 거창사건의 진실뿐만 아니라 평화통일과 인권교육의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사진: 거창군>

산청·함양에서 1대대와 2대대의 측면지원을 받으면서 705명의 민간인을 희생시킨 3대대 병력은 2월 9일 새벽 신원면에 들어가 거창읍으로 행군하던 중,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 78세대 민가에 불을 지르고, 주민 80여명을 눈 쌓인 마을 앞 논으로 강제로 집합시킨 후 군용무기로 무차별 학살을 감행했다.

그 뒤 거창읍으로 빠져나가다가 연대장으로부터 신원면에 주둔하여 잔적을 소탕하라는 작전명령을 무전으로 하달 받고 재차 신원면에 진입하여 내동마을과 오례마을에 주둔했다. 다음날인 1951년 2월 10일 신원면 소재지로 이동하여 과정리, 중유리, 대현리, 와룡리에 병력을 투입하여 전 민가에 방화하고, 주민들을 소개시킨다는 이유로 남아 있는 전 주민을 면소재지로 집결시키던 중, 날이 저물자 대열에서 뒤쳐지는 노약자 20여명을 강변도로에서 사살하고, 뒤에서 끌려가는 노약자, 부녀자, 어린이 등 100여명을 신원면 대현리 탄량골 계곡에 몰아넣고, 역시 군용무기로 무차별 학살한 후 그 시체 위에 나뭇가지를 덮고 기름을 뿌려 불태웠다.

2월 10일 오후 과정리, 중유리 전 주민과 대현리, 와룡리의 주민 등 1000여명을 신원초등학교에 강제로 수용한 다음, 그 이튿날 2월 11일 아침 주민들을 분류하여 군경가족, 공무원가족, 청방대원가족 등은 경찰의 인솔 하에 별도로 소개시킨 후, 남은 540여명의 주민들을 동교에서 700m가량 떨어진 박산골로 몰아넣은 후 그중 12명을 대기시킨 후 기관총과 개인화기로 무차별 사살하고 나뭇가지를 덮고 불을 지른 뒤, 대기시킨 12명으로 하여금 사망 여부를 확인시킨 후, 그중 11명은 사살하고, 마지막 남은 한 명이 필사적으로 살려달라고 애원하자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 위협한 뒤 철수했다.

1951년 2월 9일에서 11일 사이 거창군 신원면 일대에서 자행된 국군 11사단 9연대 3대대에 의한 집단학살 사건이 바로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이다. 1960년 5월 국회 진상조사단이 확인한 거창 민간인학살사건의 희생자는 신원면 덕산리 청연골 84명, 대현리 탄량골 100명, 과정리 박산골 517명, 기타 지역에서 희생된 18명 등 총 719명으로 되어 있다. 연령별로는 14세 미만이 359명, 11세 내지 50세가 284명, 60세 이상이 76명이었으며, 성별로는 남자가 331명, 여자가 388명이다.

한편 거창사건은 한국전쟁 당시 민간인 학살에 대해 전국 최초로 판결을 이끌어 낸 가장 대표적인 사건으로 현재 문화재청에 신청 중인 박산합동묘역과 희생장소 3곳에 대해 ‘국가등록문화재’로 등록될 수 있도록 추진하고 있다.

1951년 4월 국회조사단 방해사건을 미니어쳐로 구성했다.

◇ 임분이(당시 86세) 씨의 증언

- 1982년 ‘마당’

2월 10일 오후 5시쯤이었다. “탄량골 골짜기를 지날 무렵 그 골짜기로 사람들을 모두 몰아넣고 군인들이 골짜기 주변을 삥 둘러섰다. 나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땅바닥에 엎드렸어요. 그때 내 옆에 동네 아저씨 한 분이 손을 번쩍 들고는 ‘대장님, 죽어도 말 한마디하고 죽읍시다. 국민 없는 나라가 무슨 필요가 있소’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곧바로 총알이 날아갔지요. 문씨는 맞지 않고 열여섯 살 먹은 그의 딸이 맞고 쓰러졌어요. 이어 콩 볶는 듯한 소리가 들리며 총알이 우리를 향해 쏟아집디다.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주먹만한 돌멩이가 튕겨 가슴을 때렸어요. 찢어질 듯 아팠지만 참았지요. 1시간쯤 지났을까 솔가지 사이로 초생달이 보였습니다. 그때 갑자기 주위가 밝아집디다. 군인들이 조명탄을 쏘아가며 시체를 확인하는 거였어요. 숨을 죽이고 엎드려 있었더니 그냥 지나갑디다. 얼마 후 사람소리가 나면서 시체더미 위에 나무를 져다 날랐어요. 내 몸뚱이 위에도 나무를 올려다 놓았어요. 곳곳에 불을 질렀습니다. 골짜기는 금새 불바다가 됐습니다. 내 옷자락에도 불이 붙었지만 혹시나 들킬까봐 죽은 체하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사라진 뒤 골짜기 개울가로 기어가 허겁지겁 불을 껐지요. 그 길로 산청군 차황면의 시외가로 도망쳐 살아났습니다. 남편과 친정 어머니는 그 골짜기에서 죽었습니다” 그의 친정 어머니는 설에 딸네 집에 왔다가 변을 당하였다.

거창사건 역사교육관에 전시된 당시 증언 모습.

◇ 임채화(당시 72세) 씨의 증언

-1988년 ‘남부군과 거창사건’

신원면 박산골에 죽은 시체들은 까마귀밥이 되도록 방치된 채 한 달이 넘도록 민간인의 접근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주민들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우선 흙을 덮어두었다가, 그로부터 3년 뒤인 1954년 3월 3일에 날짜를 정하여(청명한식) 이장키로 하였다. 지금도 그때의 통탄에 젖었던 임채화 씨는 말한다.

“3년을 그 골짜기에 썩혀 둔 기재, 그 시체를 파헤치가주고 뼈를 모으는데 아이고 못 볼 일이래. 그때 그 골짜기에 있었던 사람은 지금도 간스메는 못 먹지. 절대 못 먹어. 서로 엉키붙어서 있는데 꼭 간스메한가지라. 그걸 동네 사람들이 전부 파헤쳐서 머리, 팔, 다리 해가며 뼈를 맞췄지. 누가 누군지도 모르면서 주변에 있는 뼈를 모든기라. 서로 이기 여자다, 남자다, 어린이다, 노인네다카믄, 제대로 알 수가 있나. 그래 그때 마을에 유족회 제일 어른이 계셨어. 그분이 판관 노릇을 한기재. 뼈를 한 사람씩, 한 사람씩, 맞쳐 놓고 그분이 보고 뼈가 크고 굵은 건 남자, 쪼맨한 것들은 어린애들, 어른뼈면서도 적은 건 여자, 이렇게 나눈기라. 그 뼈를 가져다 묘를 쓰는데 어찌 맨 정신으로 되겠노, 암만 부모형제 뼈라 캐도 맨 정신으로는 못해. 전부들 술을 먹고 울며불며 챙긴기재. 그때사 모두들 제정신이었겠나”

지금 거창 신원 박산에 화장하여 안장된 합동무덤은 이렇게 누군가를 구별하지 못할 형편 속에서 처절한 눈물과 통곡의 ‘한(恨)’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영철 기자 achimstory@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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