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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 토벌한다면서… 민간인 300여명 무차별 학살

기사승인 [61호] 2021.02.23  10:4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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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면서
덧씌운 죄목은 ‘빨갱이’

1945년 5월~1950년 3월
주민들을 빨치산과 협조했다고
적법한 절차 없이 집단적 사살

무수히도 억울한 죽음들이
한국전쟁 전후에 희생

2016년 8월 수동면 도북리에서 열린 ‘함양군 양민 희생자 제67주기 제8회’ 추념식 모습. 1948년~1950년 사이 함양은 지리산 인근에서 활동 중이었던 빨치산을 도왔다는 명분으로 9개 읍면에서 민간인 80여명을 포함해 보도연맹, 연고지가 밝혀지지 않은 이들까지 총 300여명이 넘는 인원이 희생됐다. 수동면 도북리 합동묘지에는 181위가 모셔져 있다. <사진: 함양군>

지난 2월 11일은 거창양민학살사건 70주년이었다. 거창뿐만 아니라 함양과 산청은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 의한 양민학살의 아픔이 있는 곳이다. 사실 한국전쟁 이전부터 양민학살은 빈번히 자행됐다. 무고한 양민들을 학살하면서 덧씌운 죄목은 빨갱이였다.

오랜 시간이 흘렀으나 남북이 분단된 과정에서 마음에 안 드는 상대에게 이념적 공세를 퍼붓는 태도는 지금도 여전하다.

양민학살의 아픔이 있는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의견이 다른 상대를 향해 “빨갱이”라고 음해하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평양 시의원입니까?”이냐며 무분별한 색깔 공세를 편 사례들은 지금도 냉전적인 시각으로 악의적인 덧씌우기를 하려는 행태가 남아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오래전 일어난 억울한 죽음들이 제대로 된 진실을 찾기 위해서는 냉전적 사고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비통한 희생에 대한 진실이 드러나는 게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2기 진실과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출범에 난관이 많았던 이유기도 하다.

한국전쟁을 전후로 함양지역에서는 여러 건의 집단 학살이 자행됐다. 1기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활동했던 신기수 조사관이 제공한 자료에 따르면 1949년 이후 빨치산 토벌작전 과정에서 민간인들이 억울하게 집단으로 엮여 재판도 없이 학살당한 일이 적지 않았다. 박명남 할머니의 오빠였던 박재득 씨가 학살됐던 것도 이때였다.

1949년 8월 31일 함양 안의지서에 감금되어 있던 춘전리 맹태호 등 7명이 지서 인근(운봉 산내)에서 총살당하는 등 1949년 8월과 9월에만 100여 명의 주민들이 희생됐다.

며칠 뒤인 9월 6일에는 백전면 백운리 신촌마을 주민 9명이, 9월 7일경에는 백전면 운산리 주민 11명이 희생됐다.

같은 시기 마천면과 지곡면에서도 피해가 있었다, 마천면 주민 김기태 씨 증언에 따르면, 군자리 솔봉에서 52명의 주민들이 척살당했다. 또 지곡면 덕암리 주민들이 지서로 끌려갔다가 대부분 풀려났으나 5명이 경찰서로 넘겨져 병곡 우루묵 뒷산에서 희생됐다. 당시 국군 3연대는 함양국민학교와 함양중학교, 상림숲, 안의면 등에 주둔하고 있었다.

9월 21일에는 수동면 죽산리 주민 17명이 함양경찰서로 연행됐다가 5사단 3연대 군인들에 의해 함양읍 이은리 당그레산(남산, 본티고개)에서 희생당했다. 다음 날인 24일에는 수동면 도북리 주민 35명이 같은 장소에서 희생됐다.

함양경찰서 사찰계 근무자였던 오정상 씨는 “1949년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나온 군인들이 주민들을 남산에서 살해했다”고 증언했다. 함양군 안의면 특공대원 박용문 씨는 “안의지서로 잡혀 온 주민들을 함양경찰서로 넘겨서 죽이거나 지곡면 가는 방향의 공동묘지에서 죽였다”고 증언했다. 함양경찰서 서하지서 특공대원 박재식 씨는 “서하지서로 잡혀온 주민들도 함양경찰서로 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말했다.

1949년 남원지구 전투사령부(대장 김백일)에 배치되었던 유치운(HA 03750) 씨에 의하면, 함양군 마천면에서 참모들을 견학시켰는데, 그곳에서 3연대 사병을 시켜 구덩이를 파게 한 후 체포된 공비 100여 명을 한 명씩 총검으로 찔러 죽이게 했다고 한다.

5사단 3연대 3대대 소대장이었던 차만석은 “1949년 당시 함양국민학교에 주둔했으며, 대대장, 정보장교의 지시로 부대원을 인솔해 함양군 이은리 당그레산에서 민간인을 여러 차례에 걸쳐 사살했다”고 증언했다.

함양경찰서 사찰계 하만수 씨는 “1949년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에서 국군 3연대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트럭에 싣고 와서 총검으로 살해할 때 현장에 있었다”면서 “군인들이 민간인들을 총검으로 찔렀으며 사망하지 않았을 경우 군인들과 함께 확인 사살했다”고 말했다.

함양군 수동면 도북리 한국전쟁 양민학살 희생자 합동묘지에서 유족과 관계자들이 영령들을 위로하며 헌화하고 있다. 사진은 2019년 8월 28일 모습. <사진: 함양군>

한국전쟁 발발 직후 발생한 국민보도연맹사건도 함양지역을 피해가지 않았다.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 볼 수 있듯 먹고 살기 힘든 현실에서 쌀이라고 얻어 보려고 이름만 올렸던 사람들이 재판이나 제대로 된 조사도 없이 무차별하게 학살당했기 때문이다.

유치장 등에 갇혀있던 주민들이 1950년 7월 21일경 함양군 함양읍 난평리 보골(신기마을), 함양군 수동면 화산리 밤나무 숲, 함양읍 백연리 두재고개, 지곡면 보산리 가운데 고개 등에서 총살당했다.

함양경찰서 휴천지서 특공대장 최병택 씨에 따르면, 휴천면 보도연맹원 50여 명이 대포리에서 총살당했다. 당시 가해자는 국군 1개 소대와 휴천지서 근무자들이었다. 수동면사건 희생자 중에는 김치규 등 미군에게 연행돼 희생된 경우도 있다.

함양, 거창지역에서는 남원에서 후퇴한 민부대(민기식 부대)를 비롯해 서해안지구전투사령부, 미 24사단 등이 1950년 7월 26일부터 28일까지 주둔했으며, 28일 안의 저지선이 무너지자 산청으로 철수했다.

미군 전투기의 폭격을 통한 민간인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인민군이 함양지역을 점령하고 있던 1950년 9월 17일 오후 5시 미 전투기 4대가 20호 규모의 작은 산간마을인 수동면 우명리를 폭격하여 가옥이 불타고 주민들이 사망했다.

함양지역이 수복되자 인민군 측에 부역한 혐의를 받은 주민들이 연행되었다. 9월 25일 수복되자 인민군에게 강제동원되었던 정위상과 정종렬이 함양경찰서로 끌려갔다. 정종렬은 며칠 후 귀가하였으나 정위상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는데, 구시골에서 희생되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무수히도 억울한 죽음들이 이어진 것이다.

이영철 기자 achimstory@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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