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fault_top_notch
default_news_top
default_news_ad1
default_nd_ad1

헌책방 골목, 추억의 책장을 넘기며

기사승인 [51호] 2020.09.19  12:53:10

공유
default_news_ad2
이진숙 소설가.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엘 갔었다.

헌책이 빽빽하게 진열된 그 골목에 들어선 순간 흑백화면 속에 쏘옥 빨려든 느낌이랄까. 뭐라 말할 수 없는 오래되고 묘한 감정들이 가슴 깊은 곳에서 일렁거렸다. 바랜 책표지와 헌책에서 나는 퀴퀴한 내가 무척 따스했다. 미처 진열되지 못한 책들이 비좁은 책방 계단과 구석진 곳에 탑처럼 쌓여있기도 했다. 바라보기만 해도 배부르고 흐뭇한 풍경이었다.

헌책방이라 반가운 책이 많았다. 책이 귀하던 어린 시절, 학교도서관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숨죽이며 읽던 낯익은 제목의 소설과 시집, 위인전들이 다시금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둘레둘레 책들을 훑다가 이수익 시인의 <아득한 봄>을 뽑아들었다. ‘밥보다 더 큰 슬픔’, ‘우울한 샹송’, ‘나에겐 병이 있었노라’… 한때 시인의 시에 푹 빠져 지내던 때가 있었다. 글이 써지지 않을 때마다 집을 뛰쳐나와 차를 타고 도시외곽을 돌면서 그의 시를 읊조리곤 했었다. 그렇게 위로를 받던 숱한 밤들이 새삼 그리워서 시집을 사기로 했다. 절판된 지 오래된 책이라며 꽤나 비싸게 불렀다.

펄벅의 <대지>도 산더미 헌책들 속에 끼어있었다. 중학생일 때 나는 <대지>를 읽으면서 주인공 왕룽, 오란과 함께 중국의 격동기를 함께 보냈었다. 우직한 오란이 왕룽과 결혼하고 땀 흘려 재산을 모아 집안을 일으키는 과정에 덩달아 부듯했었다. 그러다가 먹고 살만해지니 왕룽은 미모의 렌화에게 빠져 못생긴 오란을 무시하면서 렌화를 첩으로 들였다. 당시 내가 읽은 그 책은 세로쓰기에다 글자가 작아서 읽기에 힘이 들었다. 그럼에도 두세 번은 읽었던 것 같다. 내가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로 중국어를 선택한 것도 그 책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훗날 작품 속 무대를 꼭 한 번 가보겠다며 버킷리스트에 올려놓기도 했었다. 아직도 그 꿈을 실행하지 못했지만.

한 귀퉁이에 추억의 LP판도 보였다. 올드팝과 클래식, 가요, 영화음악… 실제 책방 안에는 LP판이 돌아가고 있었다. 근래 레트로 감성이 되살아나면서 LP판과 턴테이블을 찾는 이들이 늘고 있단다. 20대 시절, 친구들과 마산 합성동 어두침침한 지하 음악다방을 찾곤 했었다. 메모지에 신청곡과 사연을 수줍게 적어 신청곡 함에 넣으면 DJ오빠가 느끼한 멘트와 함께 신청곡을 들려줬는데… 아련한 그 시절을 기억하는 7080세대라면 한번쯤 다녀와도 좋을 곳이었다.

좀체 책이 팔리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다. 굳이 국가별 독서시간 통계를 찾아보지 않더라도 우리나라 독서인구가 저 밑바닥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최첨단 디지털시대를 증명이라도 하듯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스마트폰에 눈과 귀를 고정한 채 시시각각 업데이트 되는 정보와 영상물에 열중하느라 바쁘다. 이런 현실 속에서도 꿋꿋하게 버티는 헌책방 골목이 참으로 낯선 풍경이 아닐 수 없었다.

어쩌다 찾은 이곳, 헌책방 골목에서 인간살이의 여유와 포근함을 만지작거려보았다. 사람 내음 물씬한 골목골목과 우리네 고단했던 삶을 대변하듯 하늘까지 닿을 듯 가파른 계단과 지직거리는 잡음 섞인 LP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저마다의 추억을 찾아 책장을 넘기는 눈빛들… 어쩌다 나는 빛바랜 추억 속 그곳을 다녀왔다.

서부경남신문 newsnuri@hanmail.net

<저작권자 © 서부경남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default_news_ad5
default_side_ad1
default_nd_ad2

인기기사

default_side_ad2

포토

1 2 3
set_P1
default_side_ad3

섹션별 인기기사 및 최근기사

default_side_ad4
default_nd_ad6
default_news_bottom
default_nd_ad4
default_bottom
#top
default_bottom_notc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