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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석산성 전투,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 필요”

기사승인 [146호] 2024.10.10  14:3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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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황석산이여! 진실을 말해다오

황석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410년(태종 10년) 2월 29일 안음현 황석산에 산성을 수축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또 성종실록에는 황석산 정상에 성이 있는데 함양군의 곡식 70석이 성중에 간직돼 있다고 적혀있다. 임진왜란 전에는 군창의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석산성은 70~80도에 가까운 급경사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누구도 쉽게 접근을 할 수 없는 웅장함과 험난함을 갖춘 천혜의 요새이다.

황석산성은 70~80도에 가까운 급경사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누구도 쉽게 접근을 할 수 없는 웅장함과 험난함을 갖춘 천혜의 요새이다. 정유재란이 발발한 1597년 안음, 거창, 함양, 산음, 초계, 합천, 삼가 7개 군·현의 백성들 7000여명이 황석산성에 들어와 왜군과 맞서 싸웠다. <사진: 함양군>

 

일본은 1592년(선조 25년)부터 1598년까지 우리나라를 침략하는 임진·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임진왜란은 일본이 명나라를 치려고 하니 조선은 길을 빌려달라는 명분으로 일으킨 전쟁으로 우리의 도공들을 잡아간 도자기 전쟁, 노예 전쟁이라면 정유재란은 살육과 약탈, 방화를 일삼은 살기 가득한 야만의 전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임진왜란(1592~1596)에 이어 두 번째 재침략이 이루어진 선조 30년의 정유재란(1597~1598)의 공격대상은 조선이었다. 이순신 장군이 13척의 배로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둔 명량해전도 정유재란 때 벌어진 일이다. 정유재란은 전쟁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1598년 7월 17일 죽자 왜군이 철수함으로써 일 년 만에 끝난 무자비한 전쟁이었다. 일본은 경상도(우군)와 전라도(좌군)로 나누어 일차전쟁에서 점령하지 못했던 곡창지대 전라도를 거쳐 한양 진격을 시도했다. 좌군은 남원성을 공격하고, 우군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넘어가는 육십령 길목에 위치한 안의현 황석산성을 공격한 후 전주성에 집결할 계획이었다.

역사에는 1597년(선조 30년) 1월 15일 정유재란이 발발하고 음력 8월 16일 총포로 무장한 일본군 2만7000명이 황석산성을 공격하자 당시 수성장 곽준 안음현감과 조종도 함양군수가 결사 항전을 선포하고 안음·함양·거창·산음·합천·삼가·초계 등 인근 7개 군현의 고을에서 집결한 의병과 장정, 부녀자들까지 참가해 이틀간 치열한 공방 끝에 조선 백성 500여 명이 전사한 전쟁으로 기록돼 있다.

재조명을 주장하는 향토사학을 연구하는 측의 주장은 1597년 8월 14일부터 18일까지 5일간 황석산성에서 안음현감 곽준, 함양군수 조종도, 거창좌수 유명개, 거창현감 한형, 성주 백사림을 비롯해 7개 군현의 의병과 장정, 부녀자들까지 모두 7000명이 참가하여 일본군 우군 7만5300명 중 4만8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산성에 모여 있던 7000명이 전멸하였다는 주장이다. 5일간의 황석산성 전투에서 모두 5만5000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세계전쟁사에 가장 선두에 기록될 전쟁이다. 황석산 계곡은 시산혈해(屍山血海)를 이루어 눈을 뜨고 다닐 수가 없었을 것이고 여름날 시체 썩는 냄새는 안의·함양·거창골에 가득했을 것이다. 가족의 울부짖는 소리는 기괴하게 들려오는 듯하다. 필설로는 이루 다 설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사상자 숫자의 천문학적 차이는 규명되어야 할 사항이다. 황석산성 전투의 제대로 된 역사적 평가가 필요하다. 우리가 바라는 것은 역사고 문화다.

성 내부에 샘물이 있고 계곡이 있어 사람들이 집결하여 항전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황석산성 내의 계곡의 협소성과 샘물의 양으로 보아 무더운 여름철에 7000명이라는 대인원이 운집하여 전쟁하였다는 주장과 아무리 난공불락의 성이라 해도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훈련되지 않은 주민들이 총포로 무장한 정규 일본군을 화살과 돌로 궤멸시켰다는 데는 쉽게 동의하지 않는다. 황석산은 돌산이다. 기록이 많지 않기에 진실은 돌부처도 모른다. 우리가 졸라대면 황석산은 진실을 말해줄까. 황석산성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해발 1190m에 축조된 산성이다.

황석산성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조선왕조실록 태종실록 1410년(태종 10년) 2월 29일 안음현 황석산에 산성을 수축한 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또 성종실록에는 황석산 정상에 성이 있는데 함양군의 곡식 70석이 성중에 간직돼 있다고 적혀있다. 임진왜란 전에는 군창의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황석산성은 70~80도에 가까운 급경사이며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절벽은 누구도 쉽게 접근을 할 수 없는 웅장함과 험난함을 갖춘 천혜의 요새이다. 이런 자연적인 요새이기에 고려말 왜구는 아지발도를 선발장으로 삼아 우리나라를 쳐들어와서 사근산성을 초토화시키고도 혹시 대기하고 있을지 모르는 황석산성의 반격이 두려워 육십령을 넘어 개경을 향하려던 진로를 바꾸어 인월·운봉으로 진출했다가 미리 대기하고 있던 이성계 장군에게 대패하여 일본으로 퇴각한 역사를 갖고 있다.

황석산성은 왜병들이 전북 장수와 진안을 거쳐서 전주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중요한 성이었다. 산성에 이르는 주요 접근로는 남문, 서문, 북문, 동문에 이르는 4개의 접근로가 있다.

접근이 가장 용이한 곳은 산의 정상을 배경으로 하는 서하면 봉전리에서 우전마을을 거쳐서 가는 남문이다. 남문 위쪽에 위치한 서문은 지금은 임도가 만들어져 있으나 중간에 단절이 되어 황석산성으로 바로 접근하기는 어렵다. 북문은 심진동 용추사 입구와 유동마을을 거쳐야 갈 수 있는데 아주 가파르고 힘들다. 동문은 화림동 계곡과 서하면 황산마을로 접근하는 방법이 있으나 동문에 다다르는 순간까지 급격한 경사로 접근이 쉽지 않다. 특히 북문과 동문은 능선의 소로를 제외하고는 양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성의 출입구만 고수하면 성내로 진입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황석산성은 영호남의 요충지를 지키는 산성으로 임진·정유재란 때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 격전지임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연구와 정비의 부재로 황석산성의 역사적 의미를 살려내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에는 1714년(숙종 41년) 황석산성 순국선열들을 기리기 위해 건립된 ‘황암사’를 일본이 강제로 불태워버렸으나, 1985년 황석산성 순국선열 추모위원회를 발족하여 황석산성이 함락된 음력 8월 18일을 기일로 정해 매년 추모 행사를 지내고 있다.

한편 황석산성 보수공사는 박성필 전 재경 함양군향우회장이 국무총리 행정조정실에 근무하던 필자에게 응원을 요청하여 1993년 남문 보수공사비로 2억8000만원이 책정되면서 시작할 수 있었다.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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