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 안의는 아나키즘의 세계적인 성지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완벽한 자유를 추구하는 데서 출발하여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어떤 조직도 없는 사회의 완전한 자율성을 추구하고 경제적으로는 만인이 풍요롭게 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이념이다. 아나키즘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시대 식민지 해방을 위한 투쟁이론으로 부각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조국의 완전독립을 찾기 위한 건국운동에 나섰고 독립노농당을 창당해 현실사회에 실현시키려고 했다.
1946년 4월 열린 전국아나키스트 대표자대회 사진. 의자에 앉은 이가 독립노농당 초대 당수인 유림 선생이고, 왼쪽 편이 안의중학교 설립자 이진언 선생, 위쪽 왼쪽에서 두 번째가 안의 초대면장을 지낸 이시우 선생이다. 장소는 이진언 선생의 생가 사랑방 앞에서 촬영됐다. 뒤로 보이는 흙벽은 아직도 남아 있다. <사진: 이동원 전 안의중학교 교장> |
흔히 안의 한 사람이 함양·거창 사람 셋을 당하고도 남는다고 말한다. 안의 사람들이 의식 있고 저항적 기질과 의지가 굳고 행동하는 사람들이란 표현이다. 1946년 4월 21일부터 3일간 경남 함양군 안의 심진동 계곡 용추사에서 전국 아나키스트 대표자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때 이곳에서 아나키즘 이념 정당 결성을 의결하고, 독립노농당(獨立勞農黨) 결성을 선포하였다. 3개월 후인 7월 7일 서울 시내 연무관에서 1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국 최초의 독립노농당이 창당되었다. 동아일보, 조선일보, 경향신문 등에서 앞다퉈 보도하였다. 당시 동아일보는 ‘독립노농당 결성’ 기사를 1면에 보도하였다.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개인의 완벽한 자유를 추구하는 데서 출발하여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어떤 조직도 없는 사회의 완전한 자율성을 추구하고 경제적으로는 만인이 풍요롭게 사는 사회를 추구하는 이념이다. 아나키즘은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강점기 시대 식민지 해방을 위한 투쟁이론으로 부각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조국의 완전독립을 찾기 위한 건국운동에 나섰고 독립노농당을 창당하여 현실 사회에 실현시키려고 했다. 그리고 안의중학교, 안의고등학교, 청구대학 등의 교육기관 설립과 운영을 통해 그 이상을 펼치려고 했다. 그러나 아나키스트를 무정부주의자로 번역되었기 때문에 체제전복을 꿈꾸는 테러 집단으로 오해받아 일반 대중으로부터 소외당한 측면도 있다. 그런 연유로 민족주의, 공산주의에 비해 오랫동안 잊혀졌던 정치사상이다.
독립노농당 창당 선언문은 ‘국가의 완전자주독립과 삼천만의 자유와 행복이 보장되어야 한다’며 국가의 완전자주독립을 위해 투쟁, 노동자·농민 일반 근로대중의 최대복리를 위해 투쟁, 민주주의와 평등호조의 원칙에 합작 등 세 가지 강령을 제시했다. 노동자, 농민이 중심세력이 되어 근로대중의 최대복리를 추구하되 경제 운용의 주체로서 중소 자산충을 활용한 자주적 계획경제, 민주 입헌정치, 민주정부를 수립하자는 것이었다. ‘단주 유림 선생 기념 사업회’의 김영천 회장이 최근 역사박물관에서 찾아낸 자료에 의하면 놀랍게도 당시 미 군정청에서는 독립노농당의 당원 규모나 내용 면에서 국내 최고의 견실한 당이라고 파악하고 있었다.
함양 안의는 서부 경남의 오지로 제대로 된 여인숙도 하나 없던 두메의 소읍이다. 그런데도 멀리 함경도와 바다 건너 제주도를 비롯한 전국에서 600여 명의 아나키스트 대표자들이 모였다. 그 많은 인원이 4일 동안 어디서 먹고 자고 했을까?
안의에서 전국대회가 열릴 수 있었던 것은 이진언, 이시우, 하종진, 하경상, 하종현, 최태호, 김순종 등 안의 지역 아나키스트들의 조직력과 경제력 기반 때문이었다. 안의의 지식인은 물론 뜻깊은 청년이라면 아나키스트 아닌 이가 없기에 이들의 뜨거운 가슴이 이 거룩하고 엄청난 대회를 성공리에 치러 낸 것이 아니겠는가. 이 어디 안의 만의 자랑이리오. 이는 전 국가적 긍지요, 길이 빛날 역사적 사실이다.
안의중학교, 안의고등학교 설립 시 중요 인물들은 모두 안의에서 열린 전국 아나키스트 대표자대회에 참석하고, 독립노농당 창당에 관여했다. 안의중학교를 설립한 초대이사장 이진언은 독립노농당 초대 문교부장이었으며, 안의고등학교를 설립한 초대 이사장 하기락은 독립노농당 경북지구 특수위원회 위원장이었다.
아나키즘의 베일을 들치면 사상가 이진언이 보인다. 이진언은 이념적·문학적·정치적으로 아나키즘사상의 한가운데 있던 인물이다. 안의대회의 중심에는 잊혀진 문학가이자 사상가인 이진언(1906~1964)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이진언은 연희전문학교 문학부를 졸업하고 일본 니혼대학 문학부를 수학했다. 1933년 4월 12일 서울시 소재 출판사 한성도서에서 시집 <행정(行程)의 우수(憂愁)>를 발간했다. 시집 <행정의 우수>는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고뇌와 민족해방·계급혁명의 의지를 아나키즘에 바탕을 둔 감수성으로 담아냈다. 이 시집은 경상남도 출신 최초의 현대시집인데 현재 국회도서관과 개인 소장본 2권만 남아 있다. 시집 발간 이후에 발표된 시 ‘월영(月影)이 1934년 11월 7일 동아일보에 수록된 바 있다.
교육 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45년 함양군 안의면 유지들과 안의중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후학 양성에 노력했다. 1946년 7월 7일에는 독립노농당을 창당하여 초대 문교부장직과 독립노농당 기관지인 ‘독립노농신문’ 발행인을 맡았다. 그는 아나키즘 이념을 정치적 신념으로 삼아 현실정치에 구현하려고 몸부림치기도 했다.
안의대회는 아나키스트들에게 안의를 아나키즘의 세계적 성지로 불리게 하는 기념비적인 일이었다. 한국사회학회 회장을 역임한 김성국 교수는 <한국의 아나키스트, 자유와 해방의 전사>라는 저서에서 경상남도 함양군에 있는 안의는 한국 아나키즘의 성지라 일컬을 만하다고 칭했다. 따라서 “세계 아나키스트의 금자탑인 스페인 혁명 시 아나키스트의 저항과 비극 그리고 인간적 승리를 그린 <랜드 앤 프리덤>의 제명(題名)을 부여받아도 결코 손색이 없을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안의는 아나키즘의 세계적 성지다. 전국 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 측은 이진언 시비와 전국 아나키스트대표자대회 기념비 건립을 위해 건립비용 전액을 부담하기로 했지만, 부지를 구하지 못해 미뤄두고 있는 실정이다. 역사를 기념하려는 시비는 연고 있는 곳에 번듯하게 세워져야 한다.
우리는 여기서 기억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이 있다. 청마 유치환(1908. 8. 10~1967. 2. 13) 시인이 하기락의 추천으로 1952년 11월부터 1954년 10월까지 2년간 안의중학교 교장을 지냈다.
청마는 안의 생활을 하는 2년 동안 안의 부호 최영조의 집에서 살았다. 청마가 생활하였던 석천리 집은 위채·아래채로 구성되어 있고 넓은 마당이 있는 큰집이다. 아래채의 청마가 사용하던 방은 뜯어져 나가 빈곳으로 남아 있다. 청마가 사용한 방이 있던 곳에 ‘시인의 방’이란 표지나 시비(詩碑)라도 세우고 만들자. 청마가 학생들과 함께 통학하던 길은 청마거리로 만들자. 유치환이라는 시인을 책에서만 접하다가 이렇게 함양에서도 자연스럽게 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게 하면 이 또한 관광명소가 되지 않겠는가.
2015년 2월 경북대 사회과학대에서 열린 한국아나키즘학회 정기학술대회 및 총회 모습. <사진: 김주완 블로그> |
이철우 본지 회장 lc3434@naver.com